'옥동척강玉洞陟崗'에 나타난 7인, 그들은 누구인가?_2 문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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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척강玉洞陟崗'에 나타난 7인, 그들은 누구인가?_2

 

 

사실 '옥동척강', '풍계임류', 등 『서원아회첩』에 들어있는 겸재의 그림들에 나타나 있는 7인의 인물들에 관하여 알려면, 첩 내에 아회가 열렸던 서원과 그 정자의 주인인 이춘제가 직접 지어 넣은 '서원아회(기)'의 내용을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먼저 현 학계의 연구, 사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의 연구가 유일하다 할 수 있고 그 외의 연구자들은 최완수 학예실장의 연구를 인용하고 있었다,를 살펴보자.

 

 

 

  

도 2. 이춘제,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 중 <서원아회(기)西園雅會(記)>, 개인소장

(사진촬영 1975년 이영재)

 

 

 

西園雅會


休官以來, 病懶相成, 未窺家後小圓者, 久矣, 宋元直, 徐國寶, 約沈時瑞, 趙君受兩令1), 以謀小會, 歸鹿趙台, 聞風而至。于時驟雨飜盆, 後晴, 登臨西園, 仍又聯袂, 雨出柴扉, 徘徊於玉流泉石, 歸鹿忽飛筇着芒, 攀崖陟嶺, 步履之捷, 不減小壯, 諸公躋後, 無不膚汙氣喘, 以俄頃之間, 乃能越巒, 而度壑, 楓溪之心庵 古亭, 倏在目下。此殆詩所謂, 終踰絶險, 曾是不意者也。

及其穿林而下, 臨溪而坐, 卽一條懸瀑, 潺溪石間。濯纓濯足, 出滌煩襟, 去之膚汙而氣喘, 咸曰 微豊原, 安得務此, 今谷之游, 實冠平生。於亭逍遙, 竟夕忘歸, 臨罷, 歸鹿, 口呼一律, 屬諸公聯和, 請謙齋筆, 摹寫境會, 仍作帖, 以爲子孫藏, 甚奇事也, 豈可無識。  

顧余 自小不好詩學, 老又有眼高手卑之症, 凡於音韻淸濁高低者不經, 與親舊挹別逢歸, 酬唱, 一切未嘗開路。故輒以此謝之, 則歸鹿, 又責之以湋詩令, 不得已 破戒塞責, 眞是肉談詩云乎哉。


己未季夏 西園主人     

 

휴관한 이래로 병과 게으름이 서로 이루어져 집 뒤 소원을 들여다보지 못한 지가 오래였었는데, 송원직, 서국보가 심시서, 조군수 두 영감과 약속하고 소회를 도모하고 귀록 조대감이 소식을 듣고 이르렀다. 그때 소나기가 동이를 뒤깁는지라 개이기를 기다려서 서원에 올라가 앉았다가 그대로 소매를 잇대어 사립문을 나서서 옥류동의 천석 사이를 , 홀연 귀록이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오른다. 걸음 빠른 것이 소장小壯 못지않아 제공이 뒤따라 오르는데 땀나고 숨차지 않음이 없었으나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청)풍계의 (원)심암과 (태)고정이 홀연 눈 아래 있다. 이는 거의 시경에서 이른바 "마침내 절험을 넘었으니, 일찍이 뜻하지 않은 것이다"고 한 것과 같다. 급기야 숲을 뚫고 내려가서 시내에 임해 앉으니 곧 한 줄기 걸린 폭포가 바위 사이에 졸졸 흐른다. 갓끈을 빨고 발을 씻고 답답한 가슴을 내어 씻어 땀나고 숨찬 것을 다 버리고 나서는 모두 이르기를, "풍원(조현명)이 아니었으면 어찌 이렇게 힘쓸 수 있었겠는가. 오늘 계곡놀이는 실로 평생 으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며,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니 그대로 시화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심히 기이한 일이거늘 어찌 기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를 돌아보건대, 어려서부터 '시학'을 좋아하지 않았고 늦게는 또 눈만 높고 손이 낮은 병이 있어서 무릇 시를 짓는데 마음을 두지 않았으니 친구와 만나고 헤어질 때 시를 주고받는 일에 일체 길을 연 적이 없다. 그런까닭으로 문득 이것으로써 사양하였더니 귀록이 또 '시령'을 어긴 것으로 책망한다. 부득이 파계하여 책망을 막기는 하나 참으로 '육담시'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미(1739)년 늦여름 서원주인

[최완수, 『겸재 정선』 (현암사, 2009), p. 24; 최완수,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p. 190]

 

 

위 글에 따르면 아회참가자는 '이춘제, 송원직, 서국보, 심시서, 조군수, 정겸재, 이사천, 조풍원' 8인이 되어야 하나 화면에 나타난 인물들이 7인이고 '조군수'라는 인물을 찾을 수 없어서 인지 그림의 설명에서 '조군수'라는 인물은 사라지고, 나머지 7인이 아회참가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회 참가자가 이 7인일까?

 

 

아회참가자의 비밀을 풀다

 

 

 

 

                                                                  사오재유고 1

 

 



 

 

 

                                                                    사오재유고 2

 



 

 

 

                                                                     사오재유고 3

 



 

 

                                                                    사오재유고 4

 



 

 

                                                                  사오재유고 5

 

 

『사오재유고』(규장각 도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아회참가자 중 한 분인 '서국보 (서종벽徐宗璧)의 시문집으로 이춘제 집 후원인 '서원'에서 이루어졌던 이 '서원아회'때 지어졌던 시문들과 서로 운韻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던 그 정황이 남아있는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서국보 집안 후손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에 감사합니다.)
 
위에 나타나 있는 시문들을 살펴보면, 당시(1739년) 아회참가자는 '이춘제, 조현명, 황정(자 양보), 심성진, 조영국(자 군경), 서종벽, 송익보 7인과 이 아회를 화폭에 담았던 겸재 정선, 그리고 시를 봉했던 사천 이병연 모두 9인이라 생각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졌던 아회기의 내용 중 '(중략) 趙君受兩令 (중략)' 조군수趙君受'는 '군경君慶'으로 탈초의 오류이다.
[ 조영국 (趙榮國, 1698~1760), 농업 분야에 해박했던 조선 후기 문신.《농사총론(農事總論)》을 저술했으며 천시(天時) · 지리 · 농기(農器) · 인사(人事) 등 농사 전반에 대해 기술하고, 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본관 양주(楊州). 자 군경(君慶). 호 월호(月湖). 시호 정헌(靖憲). 1723년(경종 3) 진사가 되고, 1730년(영조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1736년 제주안핵어사(濟州按覈御史)로 나갔다. 이듬해 북관감진어사(北關監賑御史)가 되어 평안 ·함경도의 기민(飢民)구제상황을 시찰하고 온 뒤 대사간 ·대사성 등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1746년 우승지(右承旨) 때 정조부사(正朝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참판에 올랐다.
1750년 도승지 ·이조참의를 지내고, 그 해 신설된 균역청 당상(堂上)이 되어, 조세 운영의 합리화에 진력한 뒤 이조와 공조의 참판을 거쳐 1752년 세제개혁의 재능을 인정받아 호조판서에 특진하였다.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때 도성의 개천을 준설(浚渫)하고, 다음해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 1755년 찬집당상(纂輯堂上) 때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강화부유수를 거쳐 세자시강원우빈객 ·예조판서를 지냈다. 1759년 세손사부(世孫師傅)가 되고, 이듬해 수어사(守禦使)가 되었다.
농업분야에 해박하여 《농사총론(農事總論)》을 저술, 천시(天時) ·지리 ·농기(農器) ·인사(人事) ·수리(水利) ·부종(付種) 등 농사 전반에 대해 기술하고, 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조태만(趙泰萬)이 찬(撰)한 《양주조씨세보(楊州趙氏世譜)》를 증수(增修)하였다.
출처 조영국趙榮國 네이버 백과사전]
 
그리고 또 한가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 황정(자 양보)의 출현이다.
[황정 (黃晸, 1689~1752),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수령으로서 여러 고을을 돌면서 다스렸으나, 청렴하여 명리를 쫓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명성을 얻었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자는 양보(陽甫)이다. 예조참판 이장(爾章)의 아들이다. 1717년(숙종 43) 진사시를 거쳐, 1719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3년(경종 3) 정자·지평이 되고, 같은해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정언, 1730년(영조 6)에는 수찬·교리·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의주부윤(義州府尹) 때는 병영을 정비하는 등 방비를 굳건히 하였으며, 이후 우부승지·병조참지·예조참의를 거쳐, 1739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여 유학(儒學)을 크게 진흥시켰고, 1749년(영조 25) 호조참판에 올라 동지 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1년 함경도에 큰 흉년이 들자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한 관찰사로 나아가, 경상도의 곡식을 실어다가 빈민을 구제하고, 농경(農耕)을 장려하여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 그 밖에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지낼 때도 이도(吏道)를 바로잡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출처 황정黃晸 네이버 백과사전]
 
이를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 두가지 가능성으로 압축된다.
첫째, 1739년 이춘제의 집 후원과 그 정자에서 열렸던 '서원아회' 참가자는 위 인물들 7인과 정선, 이병연 9인이었으며, 위 7인과 연배차이가 컸고 아회정경을 화폭에 담았던 겸재 정선과 그 지기 사천 이병연은 옥동척강, 풍계임류 등의 화폭에서 빠져있게 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다른 하나는 아회가 1739년과 1741년 사이에 최소한 한 번 이상 더 열렸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귀록 조현명이 이춘제 편지에 답한 '서원소정기' 내용을 보면 위 기간 중 이춘제가 자신의 지비년(50세, 만 49세)을 기념하기 위하여 서원과 그 정자인 서원소정을 다시 꾸미는 치원사업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림들이 바로 아회첩 중간면에 위치해 있던 '한양전경'과 '서원소정'도라 할 수 있다. 위 두 그림들을 살펴보면 그림들이 그려질 당시 치원사업이 모두 끝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첩에 더하여진 귀록과 사천의 시가 이를 뒷받침 한다. 필자는 두번째 추론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어쨌던 새로운 귀중한 사료의 발견으로 '서원아회' 참가자 전원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 왜 이춘제가 직접지어 넣었던 '서원아회(기)'에 '황정 (황양보)'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지. 또 다른 하나의 의문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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